
대학시절 이야기
암실속에서 인화를 하면서 나만큼 노력하는 이는 없을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사진을 뽑았다. 그 결과로 수 많은 이레 없었던 상들을 타고 장학금이 넘쳐나 독립을 했다. 그 시절 나는 내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도 몰랐고 사진세계가 전부였다.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부자인지도 몰랐다. 부자가 뭔지도 몰랐다. 그저 사진!
사진의 한계를 느낀 나는 영화에 관심이 생겨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를 선택했다. USC가 그 시절 Cinema 학교로 가장 막강했고 또 나에게 어마어마한 장학금을 주었다.
독립을 했으니 먹고 사는게 광건이 돼서 그래픽 스튜디오에서 월급을 받고 밤에 클래스를 선택했다. 재미있는 시절이었다. 술도 배우고 여자도 배우고~.
Cinema는 또 다른 시각을 보여주었다. 사진은 한컷이나 씨네마는 움직임에 따랐다. 배우는 과정이 너무나도 재밋었다. 허나 나에게 불만이 생겼다. 몇몆 클라스는 교수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3~4학년생들이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그 불만은 내가 가르치다 보니 이해가 가지만 그 젊은 마인드에는 화가 나는 상태였다.
다 때려치고 Humboldt State University 로 전학을 갔다. 히피들의 천국이라고 부르던 대학이었다. 험볼트 카운티는 가장 고가 대마를 생산하는 지역이었다. 하루 한대가 내리는 공항에 대마가 재배될때는 경비행기들의 파킹랏이 될 정도로 세계가 몰려 들어왔다. 동내 시장도 대마를 키웠을 정도로 흔한 업종이었다. 한국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는 시절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유화와 문학에 매료돼었다. 홀로 지내며 글 쓰고 그림을 그리던 지금과 유사한 삶을 지냈다.
한통화 전화로 그 삶은 동강이가 났다. 어머니가 빌려준 돈을 갚지 못해 가게로 받았는데 그 가게를 운영할수 있는 사람이 없어 나보러 운영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할수없이 PCH를 따라 10시간 넘는 운전을 하여 LA로 돌아가서 가게를 돌봤다.
2년을 가게를 운영하며 놀다보니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대학은 나와야 돼잖아!”
LA 에는 그 시절 미대가 하나밖에 없었다. Otis Art Institute of Parsons School of Design. BMW를 모는 Elitist Group창시자라는 입소문을 만들고 교수들과 친구 사이가 되어 쉽게 졸업을 했다. 한 교수는 디자인 회사를 운영 중이었는데 나를 스카웃하여 자신의 회사에서 일을 하게 만들었다. 재정 상태가 안 좋았던 학교는 나를 통해 돈을 더 벌고 싶었던지 3 크레딧이 모자른다고 졸업장 대신 노티스를 통에 넣어 주었다. 나는 학교가 끝났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 까짓 졸업장이 뭐 그리 중요한가, 벌써 일하고 있는데…. 나의 베프는 3학년때 스카웃 돼어 졸업장은 커녕 돈을 벌써 많이 벌고 있었다.
2026.
미국의 미대는 매우 현실적이다. 작가를 만든다 보다는 예술을 통해 먹고 사는 방법을 가르킨다. 한국사람들은 예술가는 빌어 먹는다는 사상이 밖혀있다. 허나 지금의 시대는 다르다! 예술을 하여 먹고 사는 길이 널려져있다. 톡 튀어야 하는 세상에서 예술성 없이는 존재하기 힘들어진 세상이 됐다.
나의 대학 시절은 나에게 뿌리를 심어 주었다. 근 40년전 일이지만 아직도 대학의 철학이 남아있다.
단, 이젠 물려 줄 시기가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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